장웨이:중국과 한국의 문화 교류를 위해 다리를 놓고자 합니다

핵심제시:장위는 즉석에서 한국무용 ≪ 선무 ≫ 한단락을 공연했다.장외, 29세, 중경 유북인, 한국 부경대학교 국제지역학 박사, 부산시 명예외국시민, 한국 무형문학

장위는 현장에서'선무 (仙舞)'의 한 부분을 공연했다.

장웨이, 29세, 중경시 유북출신, 부경대학교 국제지역학 박사, 부산시 명예 외국시민이며, 한국의 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유일의 외국 전승자.

감상:문화의 전승은 위대한 작업, 중국과 한국의 문화 교류를 위해 다리를 놓고자 합니다.

장위는 어릴적부터 춤을 좋아했고 춤을 배우고 싶어했다.부모는 아이의 임무는 공부하는것이라고 말하였다.부모가 설계한 성장 노선에 따라 장웨이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다녔다.

하지만 대학 1학년을 마친후 장위는 부모를 속이고 퇴학하여 한국의 부산대학에 가서 자신이 흥미를 가지고있는 공부를 했다.

10년이 흘렀다. 이윤자 교수를 스승으로 모신 장웨이는 한국 무형문화재 27호 승무강습단의 유일한 외국인 제자가 됐다.

현재, 장웨이는 자신의 몸소 실천을 통해 중한 문화 교류의 다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스스로 뒷길을 차단하다

남몰래 퇴학하고 한국의 부산에 꿈을 찾아

2006년, 한국의 부산대학교와 중경대학교의 학생 교류 프로그램이 있었다.그해 장외는 중경공학원에서 대학 1학년을 막 마쳤다.틀에 박힌 생활이 싫었던 그는 더 이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누를 수 없어 부모 몰래 퇴학 수속을하고 부산으로 가서 대학에 다녔다.

스스로 뒷길을 끊는 것은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을 배우고 싶어서이다.장위는 차오톈먼에 가서 80 켤레의 양말을 샀으며 4년 동안 귀국하지 않고 반드시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린후 돌아올 작정이였다.장위는 몰래 결심을 내렸다.

처음 부산에 온 장위는 한국어를 몰라 영어전공을 선택할수밖에 없었다.영어는 기본이 되고 장학금도 많이 받는다고 했다.그는 별도로 한국어어학반에 등록했다. 한 학기를 마쳤지만 한국어로 교류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나는 중국에서 왔다.현지 학생들의 영어실력이 그리 좋지 않은 장위는 계책을 짜내 캠퍼스에서 큰소리로 영어를 읽어내려 많은 한국학생들의 칭찬을 받았다.그는 기회를 타서 내가 너희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테니 너희는 내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라고 말했다.

장웨이는 한 한국인 가정에 들어가 월 10만원에 숙식을 제공받았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어를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1년 후, 장웨이는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게 됐다. 그는 한 회관에 가서 접시를 닦았고 돈도 벌었고 부산 방언도 배웠다.

그 후, 교통 사고가 저를 변화시켰습니다.2007년 11월, 장외는 오토바이를 타다가 넘어져 왼쪽어깨뼈가 골절되였지만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다.45일간 입원했는데 한국학생의 부모가 그를 도와 입원비를 해결해주었다.혼자 누워 있는데 같은 병실의 한국인 친구 가족들이 화장실까지 부축하고 음식을 가져다 줬다.장위는 이번 일을 통해 은혜에 감사하는것이 성공보다 더 중요하다는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퇴원후 장웨이는 자원봉사자로 부산수산물축제, 조선전시회, 영화전시회 등 전시회에 자주 참가했으며 중국어, 영어, 한국어를 아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통역 봉사를 했다.

2009년, 장웨이는 자원봉사자 활동을 훌륭하게 하여 부산명예외국시민으로 선정되었다.

다행히 은사를 만나다

그는 한국 무형승무 전수자가 되었다

부산에서 장위는 점점 유명인이 되었다.각종 전시 판매 활동, 각종 축제 등에서 그의 바쁜 모습을 볼 수 있다.지금까지 부산 영화의 전당, 부산문화회관, 용두산공원, 해운대 등지에서 중국어로 된 자료를 번역하고 저술했다.

2008년 6월 부산 국제무용제에 참가한 11개국 손님들의 중국어, 영어, 한국어 협조, 통역을 맡았다.

장위의 뛰어난 업무능력은 조직위원회 위원장인 한국예술가이며 부산대학교 교수인 이윤자의 주목을 받았다.7월, 리교수는 항저우로 출장을 갔는데 장웨를 가이드로 지명하였다.항주 일행에 장외의 해설까지 곁들여져 중국에 대한리 교수의 인상을 바꾸어 놓았다.

너는 집에 가고 싶지 않지만 부모님은 너를 몹시 보고 싶어 하신다.리교수는 장외가 류학기간 3년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비행기표를 사서 장외가 부모를 찾아뵙도록 했다.장위는 지금 생각해보면 리교수가 그에게 가져다준것은 예술의 전승뿐이 아니라 더우기는 품행교육이라고 말했다.

리 교수는 장웨이에게 번역을 시켰을 뿐 아니라 제자로 받아들여 한국 전통무용을 전수했다.한국에 돌아온후 장위는 매주 수요일마다 무용과에 가서 수업을 받았다.이국 타향에서 그는 마침내 어릴적 무용의 꿈을 이루었다.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이해력이 높다.같은이 교수의 제자인 강미선 부산대 교수는 장웨를 이렇게 칭찬했다.장웨이는 비록 중도에 출가했지만 한국 전통 무용을 배우기 시작하니 입문이 빠르고 진보가 커서 스승은 그를 매우 좋아한다.

리 교수는 장위의 무용이 매우 장력과 표현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고전 민속 무용인 승무를 그에게 가르쳤다.

승무는 한국 전통 장삼을 입고 스틱을 두드려 춤을 추는 것으로 승려의 답답한 심정을 표현한다.

장위는 이런 춤을 아주 생동감 있게 추었고 2013년 리교수는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고옥을 장위에게 선물했다.이 옥은 믿음을 상징한다. 장위가 앞으로 한국의 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전승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문화를 전승하다

국가 예술 기금 인재 풀에 입선되다

2013년 난징에서 열린 중국 쿤웨이 무용 국제 심포지엄에서 난징예술학원 무용학원 원장, 1 급 안무가이자 쿤웨이 무용의 창시자인 마자친 교수가 장웨이를 알게 되었다.여러번의 접촉을 거쳐 마교수는 중국이라는 땅이 자신을 키워주었고 장위는 비록 한국에 있지만 중화문화의 보호와 발전을 위해 지혜를 바치겠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 말에 장위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국의 많은 문화원소는 모두 중국에서 왔다.장위는 양국 문화에는 많은 공통점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면서 특히 대부인 마 교수의 지도는 그의 꿈이 더욱 명확하고 명확하다며 그것은 바로 전통문화의 보호와 전승에 진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장웨이는 국가예술기금 인재뱅크에 입선되었고 마 교수를 도와 쿤쿤 무용 관련 자료를 정리했다.

올해 장웨는 중국에서 5개월 동안 지냈다. 신장 (新疆)의 대극장을 관람하고 윈난 (云南) 성에 가서 「 윈난인상 」을 관람했으며 쑤저우 (蘇州)의 쿤밍 (昆明) 춤 발원지를 방문했고 난징 (南京)에 가서 「 도화선 」을 탐구했다.100여쪽에 달하는 ≪ 곤무개론 ≫ 초고가 이미 기본적으로 완성되였다.

이외에도 장위는 「 천수관음 」, 「 윈난인상 」 등도 번역하여 국외에서 교류했다.동시에 그는 또한 수시로 고향의 대족석각, 천갱 지하틈새, 백제성 등 자연 · 인문 경관을 한국 친구에게 소개하여 그들이 중국 지역을 많이 둘러보고 한번 보게 했다.

부산에서 장웨는 장이머우 · 바오즈팡 · 구룽성 등 유명 인사들의 통역 역할도 했다.중국 동포와 한국 친구들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비아냥도 나온다.현재 부경대에서 국제지역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그는 기자에게 자신은 중국과 한국의 문화를 위해 교류의 다리를 놓기를 원한다고 말했다.